분명한 것은 쇼팽의 음악에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 담겨있고, 연주가 시작되면 그 감정들이 제게 다가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듣는 내내 쇼팽이 "나는 이런 감정 상태야. 넌 이 감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음악을 통해 저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쇼팽이 내던지는 질문에 저 또한 감정의 오르내림을 느끼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그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서로 비슷한 감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자질은 그 곡에 담긴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달하느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피아니스트의 역할은 곡이 가진 본연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재해석해서 머나먼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그 감정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시대를 넘어서조차 전해질 수 있는 생생한 감정이란, 신기하지 않나요? 이누리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감상하는 우리의 마음조차도 두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저는 제가 악기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네, 들인 돈이 아깝지 않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요. 저는 느릿느릿 멋지게 흘러가는 이 순간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무언가 하나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서 빠져드는 것이 오랜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은 자꾸만 몰입을 방해하는 일들로 가득하잖아요? 갑작스레 걸려오는 전화, 새롭게 떨어진 상사의 지시, 협조를 요청하는 메일, 결제를 통보하는 알림을 비롯해 무수히 자신을 봐달라고 몸부림치는 앱들의 향연. 그런 점에서 온전히 감상에 빠져드는 1시간은 그야말로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 할 때 예술이 밥을 먹여준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는 것이 예술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예술로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지 않으면서 그저 '먹고사니즘'에 입각한 삶이 우리의 최선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 상상력과 여유가 차지할 공간이 남아있을까요. 내 존재와 인생, 세계, 세상에 대한 생각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술이나 철학의 영역이 아닌가 싶거든요.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런 것들을 향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구나 생각을 합니다.
한 편으론 이제 제가 예술에 왜 이끌리는지 좀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느낀 희로애락이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이 과연 많이 달라졌을까요? 시대마다 가진 풍경은 다를지언정 다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삶이라고 해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테지요. 우리처럼 웃고 울었을 겁니다. 기술의 진보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고, 삶에서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게 현대인의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물음이 가야 할 방향은 더더욱 명확해집니다. 각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들이 삶에서 느낀 것들은 무엇이었고, 그중에서도 무엇을 시대를 넘어서까지 남기고 싶었는지 궁금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 아닐까요? 거기에 새로운 물음을 더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가 예술을 찾는 이유는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더 많은 예술가들을 찾아 그들을 감상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술가들의 생각이나 감정에 동조하고, 때로는 시대의 정서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구나를 느낄 수도 있을 거고, 어쩌면 거기에 새로운 의견을 보태며 저도 뭔가를 남기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님에게 예술은 무엇인가요? |